SON EUN YOUNG
PHOTOGRAPHY
그 집에 산다 Live in that House
집은 가족 구성원 간의 사랑과 따뜻함, 안락함 등의 정서적 경험과 친밀감을 느끼는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집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만들어 내는 장소이고, 집에 대한 기억은 자신의 가족, 친구, 지역사회 등과의 연관성을 떠올리게 하며, 이는 자기 삶의 의미와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집은 가족 구성원과 끊을 수 없는 유대감과 공동 운명체라는 정서가 녹아 있고, 추억을 공유하고 미래의 꿈을 꿈꿔 왔던 삶의 중요한 장소이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집의 의미도 점차 변화하지만, 여전히 집에는 개인의 지난 시절의 추억, 경험과 더불어 자신의 모습이 담겨있다. 집이 품고 있는 따뜻함과 보호받음은 집이 지닌 모성(母性)이고, 몸에 각인된 모성으로 인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스며있는 그 집들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최후의 가치로 남아 있게 된다.
《검은 집》 (2020년)을 시작으로, 《밤의 집》 (2021년), 2023년 《기억의 집》, 2024년 5월 13일 전시 예정인 《그 집에 산다》까지 집이라는 장소에 주목하여 작업의 중요 소재로 삼아 왔다. 나에게 집은 가족과의 정서적 유대감이 충만한 장소이면서도 가족의 부재에서 비롯된 상실감이 혼재된 장소이다. 기억 속의 집은 온 가족들이 함께하지 못하고 종종 혼자 지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집 연작들은 이러한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한다. 한 지붕 밑에 온 가족이 모여, 웃고 즐기면서 이야기하는 꿈을 자주 꾸곤 했다. 《밤의 집》 과 《기억의 집》이 집을 정물처럼 근접한 거리에서 정적인 시선으로 접근하여 바라봤다면, 이번 《그 집에 산다》는 집들이 함께 어울어져 모여 있는 골목을 중심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서울과 지방을 오고 가며 촬영한 다양한 형태의 집들을 마치 도색 하듯이 색을 입히고, 낡거나 헌 물건을 고치듯이 새롭게 표현하고자 했다. 사람의 온기와 친밀도를 느낄 수 있도록 따뜻한 색조를 많이 사용하고자 했다.
청소년 시절의 어린 마음에는, 집은 어디에나 있지만, 가족 구성원이 희로애락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집은 어디에도 없을 것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인간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듯이 자전적 기억 속의 집은 아름답고 근사한 자태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인간을 위한 진정한 집은 어디에 있는지, 집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다. 청소년기에 겪었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기억과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노스탤지어 감성으로 집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가는 여정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진정한 위안과 집이라는 장소에 깃든 삶의 아름다움과 특별함을 표현하고자 한다.
기억의 집 House of Memories
-기억과 노스탤지어 장소로서의 집-
손은영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가족을 통해 사회적 규범과 질서를 배울 뿐만 아니라 집이라는 공간에서 가족 구성원들과 감정적으로 교류한다. 집은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가 살기 위하여 지은 건축물 등을 말하지만, 생명 유지가 집의 역할의 전부는 아니다. 한 인간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생물학적인 장소이면서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사회의 규범과 질서를 배우고 세상을 알아가는 사회적 장소이다. 집은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서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의 말처럼 뿌리내림의 장소이고, 일상의 내밀한 기억과 그리움이 가득 찬 토포필리아(topophilia)의 장소이기도 하다. 집이란 공간은 지난날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노스탤지어(nostalgia)를 불러일으키는 장소이며 가족 구성원과의 유대감과 공동 운명체라는 정서가 녹아 있고 추억을 공유하고 미래의 꿈을 함께 하는 삶의 중요한 장소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집의 이런 정서적이고 정신적 의미보다는 한 인간의 능력과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며, 집의 경제적이고 물질적 가치가 인간 실존의 문제보다 상위에 군림해 버린 사회에 살고 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주거 형태는 아파트이다. 아파트는 대부분 같은 동이라면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모두 같은 평면으로 설계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공간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 속에서 개인은 미미한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울하고 절망적인 현실이다. 하지만 공간과 장소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적용해 보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각기 전혀 다른 장소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푸 투안(Yi-fu Tuan)은 사람과 장소와의 정서적 유대감을 토포필리아(topophilia)라고 규정지었다. 사람이 어떤 공간과 접하면서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누적되면 막연히 추상적이었던 이 공간은 친밀하고 의미 있는 장소가 되고, 이 과정에서 사람의 감정이 장소에 이입되면서 유대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집이나 고향 등은 잊을 수 없는 장소들이며, 여기에 담겨있는 정서적인 애착을 절로 느끼게 된다. 특히, 성인이 되기 전인 청소년기에 거주했던 집은 잊을 수 없는 토포필리아의 대표적 장소이다. 한편 현상학자 바슐라르(Bachelard G)는 일상의 내밀함이 깃든 집의 ‘구석’들에 대해 주목하였다. 즉, 내밀함이 머무는 구석에 대해 강조하였다. 내밀함은 장롱 속의 구석, 다락방, 서랍 속이나 오두막집과 같은 소박한 공간에서 찾을 수 있다. 일상의 내밀한 기억들로 가득 찬 친숙함과 여기에서 비롯되는 안식이 쌓이는 곳이 집인 것이다. 노스탤지어는 향수병(鄕愁病)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더욱 복잡한 심리 상태로, 과거의 시간과 공간이 연관되어 그로부터 형성된 감정을 일컫는다. 노스탤지어는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보편적 감정이며, 일종의 우리 감성의 자기방어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의 집> 작업은 다양한 형태의 단독 주택 위주로 작업했다. 따뜻하고 화사한 색채로 담아내며, 집과 더불어 집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작은 마당과 나무들, 애완동물과 화분, 나무 의자, 어린이 자전거와 같이 정서적으로 온기를 품고 있는 오브제를 배치하였다.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겪었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기억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노스탤지어적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어디에나 있는 듯하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집을 작업의 주제로 삼았다. 집은 어디에든 있는 것이거나 교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의미의 중심이다. 과거의 기억과 마음속의 노스탤지어가 스며있는 집을 사진 연작으로 표현해 보고, 나의 기억 속의 가족과 집에 대한 의미를 다시 살펴보고 싶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직업으로 인해 가족과 떨어져서 고등학교 졸업하는 성장기 내내 할머니와 지냈던 기억이 있어서 가족에 대한 애착과 온전한 가정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다. 본인에게 집은 가족 구성원과 끊을 수 없는 유대감과 공동 운명체라는 정서가 녹아 있고 추억을 공유하고 미래의 꿈을 함께 하는 삶의 중요한 장소이다. 외부와 나를 구분 지어주는 경계이기도 하면서 정체성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기억의 집>은 이러한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청소년기에 겪었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기억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노스탤지어적 감성으로 어디에나 있는 듯하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집을 작업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꿈에 돌아가다 Return to the Dream
꿈속에 혼이 돌아 고향에 돌아가니
놀 안개 강에 가득하고 물은 부질없이 물결치도다.
어촌은 쓸쓸히 봄빛 저물었는데
아득히 높은 집이 우리 집이로구나.
방초 돋아난 못 둑에는 푸른 이끼 끼었고
이리저리 떨어진 꽃 땅에 가득히 붉었어라.
---중략---
홀연히 물 위의 새벽 조수 움직임을 듣나니
꿈속의 혼 돛대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깨었네.
돌아오매 서글픈 마음 찾을 곳이 없고
오직 서창에 지는 달 밝게 비침을 보도다.
-꿈에 돌아가다(夢歸行), 김호연재 시집 법천의 하루, 문희숙-
김호연재는 41년간의 짧은 생애 동안 한시와 한글 시를 합쳐 240여 수라는 적잖은 양의 시를 남겼다. 그녀의 시재(詩材)에는 한 여인으로서의 외로움과 그리움, 만남과 헤어짐 등과 같은 내면의 갈등과 마음의 상처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풍경 속에 빗대어 담아냈다. 15세 어린 나이에 양부모를 모두 여의고 열아홉의 낯선 시집살이에서 겪은 좌절과 번민을 시 작품으로 남겼다. 김호연재의 시 전반에 흐르는 심상은 이별과 그리움으로 인한 아픔이다. 조선의 유교적 봉건사회에 태어난 여성으로서 지고 가야 하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은 상실과 좌절을, 더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번민과 갈등을 보여준다..
김호연재의 시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단어들이 있다. 꿈(夢), 외로움(獨), 봄(春), 꽃(花), 달(月)과 같은 시어(詩語)들이다. 꿈(夢)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시에서 많이 나타나고, 외로움(獨)은 그리운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을 겪으면서 홀로 남아있어야 하는 쓸쓸함의 또 다른 표현이다. 봄(春)은 만물이 깨어나는 계절의 알림이지만 김호연재에게 봄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가버리고 나면 시름만 남을 뿐이다. 이별하듯이 쉽게 가버리는 봄날은 외로움을 더해 줄 뿐이다. 꽃(花) 또한 활짝 피어나서 아름다움을 드러내지만 김호연재의 시에서는 지는 꽃들이 어지러이 땅에 가득하게 붉다. 달(月)은 김호연재의 시에 가장 많이 사용된 시어이다. 세월이 흐르고 장소는 바뀌었어도 오직 변함없어 그대로 밝게 비취 주는 것은 오로지 달빛뿐이었을 것이다. 꿈속 영혼이 놀라 깨어났을 때, 위로해 주는 것 또한 서창(西窓)에 지는 달이었으며 깊은 밤 함께 해주는 벗이기도 했다.
<꿈에 돌아가다> 시리즈 작업은 김호연재의 시작(詩作)을 바탕에 두고 만들어 본 것이다. 화사한 봄날의 풍경이지만 화려함에 현혹되지 않고 흔들리는 댓잎과 땅에 떨어진 꽃송이처럼 모든 사물에 배어 있는 쓸쓸함을 드러내 보았다. 고즈넉이 허공에 잠겨 있는 달과 함께 길 한가운데 교교히 앉아 있는 도둑괭이 또한 그렇게 하였다. 육신은 여자로 묶여 있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군자의 기개임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가슴에 품고 있는 광대한 호연지기의 기백은 하늘로 솟구쳐 흔들리는 대나무에서조차도 느끼도록 하고. 세속의 아픔과 상실감으로 시로 자신을 달랠 수밖에 없었던 김호연재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비범한 재능을 지녔으나 시대적 상황속에 충분히 자신의 재능을 만개하지 못한 예술가의 모습에서 시대를 건너 현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을 반추해 보고자 한다.
house at night
Park Young-taek (Professor, Kyonggi University, Art Critic)
Son Eun-young photographed small, flat houses located around Korean cities such as Seoul and Gunsan. Artificial light brightly illuminates the exterior of the house surrounded by the dark night, giving the impression that the houses are being recorded one by one, as if photographing a person. As a result, the house becomes a being endowed with personality and becomes self-reliant. The low houses, which are placed like someone's portrait, look like they are old and shabby, and willingly make people's nests elegant.
This honest house, which shows the front of itself as much as possible, without any addition or subtraction, exposes only the most basic exterior and structure of the house like a bone. It is a house with few decorations other than the roof, walls, and windows. The houses exposed so defenselessly, adjacent to the road or roadside, show only the plain walls that hide the entrances and pale. However, there are only a few windows, and a structure to protect from external gaze and contact is attached to the window to create a kind of defensive wall. This clumsy and unstable facility tends to operate as a psychological defense mechanism rather than a functional role. The walls, painted in bizarre colors, are too thin and flat, in sharp contrast to the strong roof color. The wall is reminiscent of the back of someone who lives in that house. Or, it shines sensually and embarrassment like flesh exposed without measures to the gaze of others.
Photography is supposed to show the world that already exists, but the artist sharply captures the strange visual power of the object itself. Although supremely simple, the exterior of this ready-made building/house with sufficiently interesting structure, form, and attractive color approaches itself like a dignified painting. It is like a color surface painting made up of a collage of similar colors. Therefore, the sense of sharply and densely picking up objects that have their own formative charm stands out. This photograph shows such an artist's point of view, or the texture of his strange sensibility for beauty. That is, I think that the photographer's gaze, eye, and formative sense take precedence over the object embedded in the photograph.
Reluctantly tucked under high-rise buildings or randomly tucked away in the corner of a shabby alleyway, these tiny houses stand close to the side of the road and testify to the hardships of a harsh life. Paradoxically, the beautiful and at the same time somewhat strange colors and bizarre shapes evoke an unfamiliar aesthetic sense that departs from the standardized order. It is the desperate twinkle of the alienated and marginalized, and this is reinforced by the overlapping of the warm light emitted by the house and windows. Only the roof, walls, and a few windows in between make a house a home. These houses are structures that are rare in the bustling city of today, and they are the houses of a past time period and slowly disappearing architecture that took a step back in the glamor of apartments and high-rise buildings. It is a strange and kitsch building and a house that is desperately, inevitably, and skillfully built under difficult circumstances. Perhaps that is why these houses, which we see again through photos, reduce the sense of reality and give them the feeling of being set in a movie or drama set. Rather than a realistic space where people live, it is almost a surreal and dreamy scene. Because the picture was taken at night, that feeling is heightened even more.
At the same time, this photograph records the moment when the everyday scenery of the ordinary surroundings is transformed into a special being. The artist encountered and observed a scene at the moment when a strange bursting sound was made in the reality he encounters on a daily basis. Looking at the reality as we know it, he picks up a certain loneliness, strange desire, and shock from the exterior of the house he faces in a familiar space and takes it. It was intended to reproduce the moment in a photograph that hints at something other than the visible sight. It is close to the so-called nostalgia for a fleeting moment. The artist salvages what has become a special moment or scene at night, and considers that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coexist in the photograph, beyond everyday life and daily life. In our daily life, we always look at the scenery of reality, but we do not see the unique moment that is hidden within it. In that sense, the artist is the one who sees it and the beings who show it. It is to see, to see, the extraordinary in everyday life, the unreality in reality, the dream in things, and another world in the landscape are connected. The artist discovers something secretly hidden in the real world.
All objects in the urban space are silent and immovable. Although they have a body but do not have a mouth, there is no voice, so there is no sound that reaches the eardrum. The strange characters and words that look like hieroglyphs from which grammar and rules have been erased are cold and stubbornly rubbed against the skin of the object. The exterior wall of the unfamiliar house holds various traces and scars. The time of the past and the present is full of it, and the body odor and fingerprints of someone who was with it are pressed down, creating a layer of low relief. So, if you give your eyes to the skin of an object, the life and history of the object will come and embrace you without any mediation. A city filled with countless objects is a huge text and sensual body in that sense. It is a landscape as a text read with the eyes and imagined with the heart. To live in a city is to live in things and to become an observer observing things. It is also about asking questions about the space and environment around you.
The artist actively infiltrates the city, observing and finding something. What she finds are small houses embedded in darkness. The walls of those houses, which have enclosed walls like castles and emit simple lights like lanterns, only show the other side of someone's life that is impossible to fathom and unknown. The absence of the front, and thus the expression of the back, activates the viewer's imagination. It's more honest than the front, which has to have multiple personas. Even the space of a house is closer to the truth than the interior or living space inside it. The artist hears inaudible voices in front of the wall and sees the people in the house making fun of the invisible people. I'm imagining Facing the boundary of the exterior wall of the house marinated in silence, he looks at the skin and beyond at the same time.
In this empty landscape with no trace of human beings, only strange (?) buildings and windows that transmit softly shining light from inside the house are placed in heavy silence. Rather than a landscape, I get the feeling of a cold, instantaneous still life. However, viewers implicitly imagine the traces of living and the place of people through the bright windows. At night, the window where sunlight was gathered emits the light inside again. It is like a signal of salvation sent to the outside by houses isolated in a barren and absolute darkness.
If you think about it, all houses are very stubborn and closed to others. The final destination of people is their own home, but it is extremely private, so intimate and solitary. So, the house of the other is just as different as the other, even more than that. Moreover, after the collapse of the community in which the distinction between the public and private realms is ambiguous, such as in traditional societies, the city shows doubts and alertness toward others it is not aware of, and reflects this through the structure of the house. An apartment space would be a prime example of this. The apartment has the appearance of a functional complex like a machine.
On the other hand, the house Son Eun-young photographed is a detached house, which has been pushed out and degraded from the current living space, and still retains traces of the poor past, and does not hide the poor and simple living. The flat houses surrounded by walls leak a window suggesting the existence of a room and a light that radiates the presence of a person in it. The artist emphasizes the fact that such houses still exist around us, and that there are certainly people who live and live, sleep, dream, and plan for tomorrow. Through the exterior of these houses in the world that the artist shows, standing upright against the backdrop of the night, we remember the life and life of someone inside. Perhaps that's why the artist wants these photos to be "consolation to wounded humans."
In fact, after photographing these empty houses, the artist added lighting to the windows through post-processing. So, it creates a fiction that looks like an actual electric light is spreading. The houses are lit from the front. Roofs and walls protrude out of the darkness. These houses seem to be isolated or pushed out from the surrounding landscape. These awkward and pitiful houses, which have a foreign and unfamiliar appearance compared to the surrounding landscape, also represent the portrait and life of such a person. On the other hand, unlike the appearance of the house, which looks unattractive, the light from the small window is bright and very confident. It prolongs every moment that he endures with his pride that is not terrified of his poverty.
In this way, the artist composes interesting landscapes and still lifes using the already existing urban landscapes and small houses as objects. It is an unexpected beauty and formativeness created by a strange combination of exquisite composition, bizarre form, and attractive colors while being involved with the ready-made aesthetics that already exist. Photography is the work of sticking to the skin of something that already exists and scooping it out, but at the same time, it provides a visual image that crosses the distinction between photography and painting by unconsciously salvaging a very unfamiliar and strange beauty from it. As Benjamin mentioned, it leaks the surreal power possible due to the mechanical gaze of photography, which is different from the tamed gaze of humans. So, this photograph starts from the most common and familiar photograph, but at the same time, it is a photograph that acutely perceives the mysterious point that can be found in the humble subject matter. It is the thought that a strange feeling and a certain kind of energy that is difficult to describe and difficult to define is rising from the darkness into a dense layer of air, like a mist wrapped around the body. It seems that the artist wanted to film 'that'.
Son Eun-young's photo, Horse and woman
Kho, Chung-Hwan Art Criticism
Photography is violence. It's hard to generalize, but there's definitely something violent about pointing a camera at someone defenseless, in the face of people crying, in the face of people in despair, and at a burning house. Perhaps the world’s saying that if you are photographed you will die came from the original photograph. However, it is not possible to stop recording and testifying about reality. It is the duality and ambivalence of photography. It is the fate of photography that records and testifies to violent reality in a violent way. Somehow, there is only a difference between the case and the degree, and it could be the fate of all images. And interestingly, most of the images come from photos.
Photography is a science, painting is a sensation. It is a one-sided and partial statement, but it seems to be the case in general. In this way, assuming that photography is a science, photography is a product of evolution and development. In the early days of the invention of photography, like science, there were countless formal experiments and a lot of trial and error. From the present point of view, those photos are failed photos. At the same time, they are pictorial and sensuous photos. Although there were pictorial photos in the history of photographers, they are more pictorial, sensuous, and modern than the photos that were aimed at painting from the beginning. In the meantime, it may be the result of the wider range of photography, painting, and the concept of modernity.
There was a forest fire in Goseong. Son Eun-young ran to take a picture in a month. To some extent, the author's instincts must have worked. He said earlier that there is something violent about pointing a camera at a burning house. In that way, did the writer succeed in documenting and testifying to the violent reality, even at the risk of violence? I don't think so. When it comes to documenting and testifying to reality through photography, the artist seems to have failed. It may have succeeded in documenting (filming) a violent reality, but it seems to have failed in witnessing (printing) the same reality. Rather than testifying to a violent reality, the artist's photos seem to be aiming at a different point, such as pictorial and sensual, romantic and even noble. Through photography, it can be said that the violent reality is transformed into an aesthetic reality, and the raw reality into an adapted reality. This is not a simple problem of failure, but a problem that should be viewe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artist's interests. In terms of other interests, the artist's photos look successful.
So, where and how does that change and its intention come from? Here, the artist recalls the early photo printing method when photography was invented. Van Dyke Brown print. It is an analog method of making and developing photo paper by yourself. Image manipulation and editing are now done on a computer, but in traditional manual work, the manipulation takes a form exposed to chance. Here, I can only provide the initial source for the photo, but the aura needed for the photo is created by chance. If you think that the aura is decisive in photography, coincidence makes the photo. There is something magical about watching an unprecedented image that I can't control, and how coincidence alters reality. There is something magical (which alters reality) and something superstitious (spiritual, invisible, holding onto something Aristotle would call a ghost). There is a reality different from reality. There are stories that the photos tell themselves, and there are stories that the photos tell themselves.
So, what is that other reality? What other reality does a photographic coincidence open up? Again, there was a forest fire in Goseong. And the artist left the scene as a photograph. The photos left behind succeeded in documenting reality, but failed to testify to reality. The Van Dyke Brown print that the artist calls is not even black and white. Colors ranging from light brown to dark brown with rich midtones transform violent reality into pictorial reality. It transforms the geopolitical reality of the here and now into an anonymous reality, an unprecedented reality, and a distant reality beyond time. Somehow, rather than filming the scene of a wildfire in Goseong, it just reminds us of a degraded landscape and a bleak image. Decayed landscapes and desolate images? It is the keyword of romanticism. Romanticism does not believe in reality. Reality has meaning only as an opportunity to remind us of unreality. And it is the fallen landscape and the desolate image that reminds us of the unreal in reality. The landscape and the image somehow evoke melancholy and evoke nostalgia. Melancholy, nostalgia, and other emotions of romanticism. Thus, romanticism turns reality into aesthetics (or aesthetic reality). And Nietzsche said that this life was incomprehensible by anything other than aesthetics.
A steel structure is standing inside the iron fence facing the beach. It must have been that there was only a structure from the beginning, or that only the steel frame was left behind. A sculpture can be seen on one side of the structure that may have been a cafe. It is a statue of a woman of a horse and a half-ra. The horse faces the seashore, and the woman faces inward. The horse is looking beyond the world, and the woman is looking into the world. Perhaps it is the theme of a horse trainer in a circus, but in the artist's photographs, the theme reads like a romantic allegory intertwined with the boundaries between reality and unreality, life and death.
Under · Ground : 닫힌 공간 또는 열린 공간으로서의 지하철 2호선
김소희(독립 큐레이터)
지하공간은 문명의 역사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오랜 옛날 인간은 맹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고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자연 동굴이나 직접 손으로 땅을 파고 지하에서 살았다. 이제 더 이상 지하 동굴에서 살지 않지만 굴착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정교해지면서 지하공간은 현대 도시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공간이 되고 있다.
인류 문명에서 뿐만 아니라 지하 세계는 고대 신화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그려져 왔다. 그리스 신화 중에 페르세포네(Persephone) 신화는 계절의 순환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데 지하 세계는 곧 겨울을 상징한다. 페르세포네는 한 송이의 수선화를 꺾은 대가로 저승의 지배자이자 죽은 자들의 신인 하데스(Hades;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또는 ‘땅속에 있는 것’을 통칭한다)에 의해 지하 세계로 납치된다. 딸을 잃은 데메테르(Demeter;곡물과 번식의 여신)가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자 꽃과 풀이 시들고 과일은 열리지 않았다. 신들이 굶어 죽어가는 인간들을 불쌍하게 여기자 제우스가 페르세포네를 1년 중 1/3은 지하세계에서 살게 하고 2/3는 지상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도록 중재한다. 페르세포네가 지상에서 지낼 때는 곡식이 자라고 과일이 열리지만 다시 지하 세계로 돌아가면 땅은 얼어붙는 겨울이 된다.
이처럼 고대 신화에는 계절이 순환하듯이 인간의 삶도 지상과 지하를 순환한다는 것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었다. 고대인에게 지하세계는 죽음을 의미했으나 그들은 지상에서의 삶이 끝나면 그 다음 지하에서의 삶이 이어진다고 믿었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문’이 바로 동굴이었다.
무기를 연마하여 맹수와 대적할 수 있게 된 인간들이 동굴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동굴은 더 이상 삶의 공간이 아니라 죽음과 부패의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또한 도시 문명이 형성되면서 동굴은 삶의 이면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또 다른 기능을 목적으로 하는 지하 공간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는 문이었던 동굴은 오늘날의 터널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이기는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로 복잡해지고 정체되는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하 터널로 다니는 새로운 교통수단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손은영은 지난 1여 년 동안 서울의 지하철을 찍어왔다. 그녀는 9개의 지하철 노선 중에서 서울의 중심부를 타원형을 그리며 운행하는 2호선을 선택하였다. 2호선은 전체 50개의 역 구간을 지하와 지상을 교차하면서 유일하게 순환하는 특별한 노선을 가지고 있다.
지하철을 찍었던 작업 중에는 대표적으로 브루스 데이비슨(Bruce Davidson)이 1980-81년까지 뉴욕의 지하철을 촬영한 「Subway」가 있다. 그는 지하철 안 밖에서 만난 뉴욕의 다양한 사람들의 초상을 리얼하게 포착하였다. 독일 사진가 미하엘 볼프(Michael Wolf)는 연간 30억 명이 이용하면서 지옥철이라 불리는 출·퇴근 시간대의 도쿄 지하철에 시달리는 시민들의 고단한 모습을 「도쿄의 압축 Tokyo Compression」연작에 담았다.
손은영은 이들과 달리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지하의 풍경을 보여준다. 누군가 "지하철은 도시의 몸에 흐르는 핏줄 같다"고 표현한 바와 같이 지하철의 맨 앞에서 바라본 전경을 보여주는 사진들은 마치 ‘차가운 콘크리트 핏줄’ 속을 탐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저 멀리서 지속적으로 다시 설정되면서, 결코 다다를 수 없도록 끊임없이 달아나버리는 소실점을 향해 달려가는 영상 작업 < ?제목? >도 함께 선보인다. 달리고 있는 철도의 속도로 인하여 변화되는 공간적인 관계들은 앞선 공간의 소멸과 이후 공간에 대한 기대라는 이중의 과정을 통해 경험된다. 이 작업은 스틸사진과는 또 다르게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적 경험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제공한다.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지하철을 타고 다녔지만 한 번도 체험할 수 없었던 것으로 ‘기관사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질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또는 지상에서 지하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은 마치 페르세포네가 두 세계를 오갈 수 있었던 관문인 동굴(오늘날의 터널)을 통과할 때의 감각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지하철(Subway)은 가장 먼저 산업 혁명의 메카인 런던에서 1863년 1월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메트로Metro(당시 도시철도망을 구상한 Metropolitan회사의 이름을 따서 지하철을 메트로라 부르게 됨)는 근대적 삶의 형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공장의 노동자들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일터로 짧은 시간 안에 대량 수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운율과 시각적인 이미지를 노래했던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1908년부터 1920년까지 런던에 거주하는 동안 지하철에서 받은 인상을 ‘지하철 정거장에서’(1916년)이라는 시를 통하여 쓴 바 있다. 이 시는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로 짧고 경쾌한 리듬을 가진 두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증기 기관차로 운행되면서 석탄 매연을 까맣게 뒤집어쓴 채 한 무리 유령처럼 내리는 군중들의 열악한 삶의 환경을 시인은 그렇게 묘사했으리라.
1900년 파리의 지하에 도시철도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철도가 반갑지 않았던지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아침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을 집어삼키는 미노타우로스 신화 속의 광폭한 황소로 묘사한 바 있다. 그에게도 지하철은 “창백한 안색으로 바느질하던 소녀나 잠이 덜 깬 점원들”이 타는 소시민들의 교통수단이었고 파리의 지하는 밤이면 불빛이 환하게 켜지는 황천길로 비유되었다.
손은영 역시 이번 <The Underground>연작을 통해 삶의 속도에 지친 현대인들의 소외와 고독을 드러내는 인물들을 주목하였다. 그 사진들 앞에서 우리는 기차 안, 호텔, 영화관 등의 공공장소에서의 도시인의 고독을 그렸던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을,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의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손은영의 이번 연작은 이제 현대인들의 일상을 상징하는 공간이 된 지하철에서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또는 보이지 않았던 심리적 공간, 즉 도시의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사진적 시각으로 드러내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